영화 <현기증(Vertigo)>과 Bernard Herrmann


히치콕의 영화 중 내 머리 속에 가장 강렬한 인상을 남긴 것은 누가 뭐라고 해도 단연 <싸이코>이지만, 가장 매력적인 영화를 꼽으라고 한다면 주저 없이 <현기증>을 꼽을 것이다. 아름다운 한쌍의 남녀가 가진 비밀과 속임수, 그리고 서스펜스로 점철된 비극적인 로맨스는 시대를 막론하고 인기있는 스토리가 아니던가.



현기증기법(Vertigo Effect)이 사용되었던 계단


배우들의 걷는 방식까지 따로 지시했을 정도로 완벽주의자였던 히치콕이 이 영화를 통해 관객에게 보여주고자 의도한 다양한 장치들과(이를테면 Vertigo Effect) 큰 의미가 없지만 의미심장해 보이는 수 많은 장면들은(맥거핀) 나를 꿈을 꾸는 듯 어지러운 혼란의 세계로 안내했고, 스카티와 주디의 서로를 향한 편집증적인 사랑은 나의 마음을 황폐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나는 <현기증>의 매력에 굴복당했다. 그러나 영화가 지닌 수많은 매력 중에서도 가장 강렬하게 내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다름아닌 버나드 허먼이 작업한 사운드 트랙이다. 그의 음악은 초현실적인 분위기로 충만한 이 복잡한 영화를 한층 더 신비롭고 아름다운 작품으로 승화시켰다.



"Prelude And Rooftop"



킴 노박의 눈동자가 점점 클로즈 업 되면서 마치 현기증을 일으키기라도 하겠다는 듯 기하학적인 모양의 그래픽이 소용돌이 치듯 돌아가는 이 의미심장한 타이틀 시퀀스에 삽입된 곡은 Prelude And Rooftop로, 내가 <현기증> OST 앨범에서 두번째로 좋아하는 트랙이다. (트랙 #1)


앞으로 등장할 인물들의 신경질적이고 편집증적인 정서 상태를 예언이라도 하듯, 혹은 직후에 이어질 스카티의 불운한 사고를 암시하는 듯 불안한 감정을 극대화시키는 이 곡은 나로 하여금 "현기증"이라는 단어를 음악으로 전환한다면 바로 이런 느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가끔씩 기분이 내킬 때 마다 위의 타이틀 시퀀스 만을 감상할 때가 있는데, 그 때 마다 히치콕과 허먼의 시너지 공격은 나에게 가벼운 현기증을 불러 일으키곤 한다. 진짜 마법사들이 아닐까, 이 사람들?



"Scene D'Amour"



스카티는 매들린이 종탑에서 추락하여 사망한 이후 그녀와 꼭 닮은 주디를 만나 새로운 관계를 시작하게 되지만  잃어버린 연인에 대한 상실감이 이미 그를 정서적 불안정 상태로 몰아 넣었기 때문에 새로운 관계는 어딘지 모르게 불안하기만 하다. 그러던 중 그는 주디에게 매들린을 닮은 헤어 스타일과 의상을 강요하기까까지 하며, 주디를 통해 매들린과의 재회를 꿈꾸는 듯한 편집증적이고 도착적인 성향을 드러내 보인다.


일반적인 연인의 관계를 떠올리면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스카티를 사랑하는 한편 그에게 깊은 죄책감을 느끼고 있는 주디는 그의 요구를 수용해 주었고, (죄책감의 원인은 스포일러*) 마침내 매들린과 똑같은 모습으로 스카티의 앞에 등장하는 주디와 그런 그녀에게서 옛사랑을 겹쳐보며 만족감과 안도감을 느낀 스카티는 서로의 애정을 확인하기라도 하듯이 깊은 입맞춤을 나눈다. 바로 이 장면에서 등장하는 곡이 Scene D'Amour이다. (트랙 #15)


고혹적이면서도 어두움이 느껴지는 Scene D'Amour의 선율은 비이성적인 집착과 죄책감으로 얼룩진 두 남녀의 기이하고 비극적인 러브 스토리를 관객들이 감정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최고의 매개체이다. 개인적으로는 허먼이 히치콕과 함께 작업하여 남긴 결과물 중 가장 탐미적인 매력을 지닌 명곡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