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토 (Summer, 2018)


진정한 의미의 새해 첫 영화. (1월 1일에 보헤미안 랩소디를 보긴 했지만 그 전에 이미 두 번이나 본 영화니까 논외이다.) 영화를 고르는데 까다로운 편은 아니지만 레토의 경우 영화의 소재와 정치적인 상황, 그리고 평단의 평가까지 놀랍도록 내 취향에 맞아 떨어져서 꼭 극장에서 관람하고 싶었던 작품이다.


레토는 스토리텔링에 충실한 전기영화라고 하기 보다는  찬란하게 빛나는 어느 여름 날의 한 순간을 그대로 담아낸 사진과 같다. 빅토르 최라는 인물의 실화를 다루고 있긴 하지만 그의 개인적인 서사나 밴드 키노의 활동, 그리고 비극적인 죽음은 깨끗하게 들어 냈다. 그 대신 영화가 조명한 것은 1981년의 여름, 억압된 사회 체제 속에서도 영혼 만큼은 억압당하지 않았던 인디 뮤지션들과 그들의 열정, 그리고 그들을 스쳐 지나갔던  강렬한 감정이다. 


영화는 빅토르, 마이크, 나타샤 세 사람의 사랑과 우정, 관계를 조명한다.


개인적으로 나는 마이크에 감정을 이입하며 영화를 감상했는데, 아무래도 레토 내에서 감정을 가장 알기 쉽고 또 많이 드러내는 인물이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우선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을 온전히 소유하지 못했지만 그것을 감수하는 모습으로 그려졌기 때문에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고, 그럼에도 빅토르의 음악적인 재능을 물심양면으로 지원하는 것이 굉장히 멋있었다. 거기다 실제로 마이크가 그런 생각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영화에서는 검열이 엄격한 소련에서 받아들여지는 가사를 쓰고 그것을 바탕으로 안정적인 활동을 하는 본인 스스로에 대한 열등감이랄까 자괴감 같은 것이 느껴져서 거기에 더욱 감정이 이입되기도 했다. (마이크의 가사는 서정적이고 아름답지만 시대를 대변하는 느낌은 아닌 반면, 빅토르의 가사에는 사회주의 국가의 어두운 면이 그대로 담겨있는 것으로 그려진다.)


영화가 담아내는 시기가 굉장히 한정적이여서 그 이후 그들의 관계가 어떻게 발전했으며 음악 활동은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유추할 수는 없었지만, 정말로 그들의 1981년을 살짝 엿본 것 같은 느낌이 들었고 스토리에 반드시 마침표를 찍어야 하는 것은 아니지 않나 싶어서 있는 그 대로 굉장히 마음에 들었다.



레토의 또 다른 감상 포인트는 바로 그 시절 인기있었던 훌륭한 뮤지션들의 커버 곡을 들어볼 수 있다는 점이다. 위에 영상을 첨부한 Iggy Pop의 Passenger부터 시작해서 Talking Heads의 Psycho Killer, Lou Reed의 Perfect Day 등 수 많은 명곡들이 재해석되어 삽입되는데 영상과 음악 모두 훌륭하기 때문에 좋은 볼거리 이다. 뮤지컬 느낌도 나고 코믹한 요소들이 많이 들어가서 재미있기도 하다. 


중간 중간 클래식 락 앨범들의 커버를 재해석한 장면들도 나오는데 더쿠들이라면 소소한 재미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정확히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Rolling Stones의 Sticky Fingers, The Beatles의 Abbey Road, With The Beatles, Pink Floyd의 Wish You Were Here, The Velvet Underground, The Who의  Who's Next 는 확실히 생각난다. 이거 확인하러 한 번 더 보러 갈 기세.


관객과의 소통을 담당하는 회의론자(Skeptic)


그리고 한 편의 짧은 뮤직비디오가 끝날 때 마다 실제 상황이 아니라고 알려주는 회의론자(Skeptic)의 역할도 꽤 흥미롭다. 영화를 보고 있는 이 시대의 우리가 할 법한  생각을 등장인물들에게 말하기도 하고, 상황을 정리하고 상상과 현실을 구분해주기도 하는데 덕분에 색다른 영화 감상을 할 수 있었다.


나에게 있어서 레토는 기타를 치며 서로의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다가 거침없이 옷을 벗고 바다를 향해 뛰어들 수 있는, 젊음이 가득한 1981년 여름의 해변이다. 내가 잘 알지 못하는 검열로 가득한 억압된 시대의 이야기이긴 하지만, 이따금씩 앨범을 꺼내 들춰 보듯이 레토를 떠올리며 그 여름을 함께 추억할 수 있을 것 같다. 오랜만에 애상적 아름다움이 넘실거리는 영화를 본 것 같아서 기분이 매우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