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 (怒り, RAGE, 2016)


1. 멀티플렉스에서 다양성 영화라는 명목으로 상영하는 영화들의 경우, 대개 상영 기간이 짧고 특정 지점에서만 상영하는 것이 대부분이어서 마음먹었을 때 바로 관람하지 않으면 보기 어려울 때가 많다. <분노> 역시 그런 이유로 극장에서 관람하는 것을 거의 포기하고 있었는데, 마침 상상마당에서 상영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서 홍대까지 한걸음에 달려갔다.


2. 엔딩크레딧이 다 올라간 후 자리에서 일어서는데, 굉장한 피로감이 몰려왔다. 문자 그대로 완전히 지쳐버렸다고 해야 할까. 누군가가 지어낸, 가공의 이야기를 보면서 이렇게까지 감정을 소비할 수 있다는 사실에 약간 놀라기도 했다. 감독의 연출력과 배우의 기량 중 어느 하나도 부족하지 않았던 영화이기에 가능했던 일이 아닌가 싶다. 덧붙이자면 사카모토 류이치가 사운드트랙을 맡아서 음악마저도 너무나 훌륭했다. 


영화의 분위기와 주제가 가장 잘 드러났다고 생각하는 곡


3. 여기 저기에 스릴러라고 소개되어 있기는 하지만 영화가 진짜 보여주고자 한 것은 살인사건의 범인이 누구인지 밝혀내는 과정이 아니라, 누군가를 신뢰하거나 불신함으로 인해 절망하고 분노하는 사람들의 모습이었던 것 같다. 결국 믿음(혹은 불신)과 분노, 이 두 가지가 각각 다른 장소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는 세 가지 스토리 사이를 관통하는 하나의 주제인 것이다. 영화에는 불신으로 인해 사랑하는 사람을 잃거나 신뢰로 인해 배신의 상처를 입는 것, 크게 두가지의 이야기가 담겨 있는데 서로 역설적인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분노하고 슬퍼하며 괴로워하는 같은 결과를 도출해 낸다는 점이 특히 흥미로웠다.


3. 개인적으로는 도쿄의 이야기가 마음에 오래 남는다. 유마의 의심은 타당하고 합리적인 것이었지만, 그 작은 불신이 가져온 결과는 너무나도 가혹했다. 비극적이게도 나오토는 언젠가 그의 곁을 떠날 운명이었겠지만, 이별의 아픔과는 별개로 사랑하는 사람을 의심하고 부인했던 기억은 유마의 인생에 아주 오랫동안 깊은 죄책감과 흉터로 남을 것이다. 최소한 오키나와나 치바의 경우 관계 회복의 여지가 있지만, 도쿄는 그런 시도 조차 할 수 없으니.


4. 봉준호 감독이 나오토 역의 아야노 고를 걸어다니는 상처에 비유한 것을 보았는데 영화를 보고나니 비로소 이해가 됐다. 왠지 모르게 눈길이 가는 배우인듯. 이렇게 나의 새로운 필모그라피 탐색은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