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 (Captain America: Civil War, 2016)

1. 스티브 로저스에게 버키 반즈는 단순한 의미의 친구가 아니라 그보다 더 중요하고 소중한 존재이다. 그는 스티브가 보잘것 없었던 시절부터 그의 내면을 이해하고 그것을 존중해 줬던 거의 유일한사람이기 때문이다. 전작인 <캡틴아메리카: 윈터솔져>에서 스티브는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Even when I had nothing, I had Bucky."


2. 버키 반즈는 모든 문제의 중심에 있지만, 그 중에서 그가 선택했던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가 본인의 의지로 무언가를 선택한 것은 하울링코만도를 결성하여 전장에 나서는 캡틴을 따라 나섰던 것, 그리고 와칸다에서 스스로 얼려질 것을 결심하는 순간 뿐이다. 게다가 윈터솔저로써의 그는 법법자이자 가해자 이지만, 그의 인생 전반을 놓고 보면 전쟁의 피해자이기도 하다. 평범한 브루클린의 청년이었던 그는 끊임없는 고문과 세뇌를 통해 기억을 잃고 완벽한 살인 병기가 되었고, 인생 대부분의 시간을 얼려진 채로 보냈다. 그리고 하이드라의 필요에 의해 짧은 기간동안 해동되어 임무를 수행하고 곧바로 다시 얼려지기를 반복했다. 그리고 작중에서는 그가 하이드라의 도구로써 죽였던 수많은 사람들에 대한 기억으로 괴로워하고 있다. 친한 친구를 따라 전장에 나섰던 그 한 번의 선택이 그의 인생을 나락으로 떨어트린 것이나 마찬가지인 셈이다.


3. MCU 세계관에서 정부나 국제기구는 대부분 멍청하고, 책임감도 없다. 어벤져스 1 사태 때 그들은 더 큰 피해를 막겠다는 명분으로 수많은 무고한 뉴욕 시민들을 거의 죽일 뻔 했지만, 그에 대한 책임은 다른 이들에게 떠넘겼다. 시빌워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모든 일련의 사건의 배후는 하이드라이지만, 그것을 밝히기에는 본인들의 무능함이 만천하에 드러나는 셈이니 적당히 버키 반즈를 내세워 책임을 전가하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토니 스타크가 버키 반즈의 무고함을 증명하자, 로스 장관이 오히려 그를 위협하는 장면을 보면 막연한 느낌은 확신으로 변한다. 게다가 스티브 로저스는 퍼스트어벤져, 윈터솔져 등의 사건들을 경험하면서 개인을 통제하는 상위 기관으로 인한 폐해를 수도 없이 목격해 왔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의 버키를 어디에 마음 놓고 맡길 수 있을까.


4. 연출이 스티브 로저스나 버키 반즈의 감정선이나 서사에 굉장히 불친절하다고 느껴졌다. 배우들의 인터뷰를 보면 스티브와 버키의 관계성이나 그들이 가진 고뇌와 죄책감 등이 명확한데 비해 실제 영화에서는 그것들이 눈에 띄게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이 문제이다. 그에 반해 토니 스타크의 부모님에 대한 트라우마는 영화 초반부 부터 매우 일관성있게 그려진다. 스타크 부부의 암살 장면 또한 여러번에 걸쳐서 등장하고 말이다. 캡틴 아메리카 시리즈에 대한 이해 및 각 캐릭터의 서사에 대한 사전 지식 없이 시빌워를 본다면 캡틴아메리카와 버키반즈는 무조건적인 가해자, 토니 스타크는 피해자로 보일 수 있을 것이다.


5. 내가 아이언맨 시리즈 중 3편을 가장 좋아하는 이유는 3편에 이르러서야 토니 스타크가 모든 트라우마를 극복하는 모습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이거야 말로 트릴로지가 보여줄 수 있는 가장 완벽한 엔딩이라는 생각까지 했을 정도이다. 그런데 그 이후에 나온 어벤져스 2 부터 지금의 시빌워에서의 토니는 극복했던 트라우마가 다시 재발이라도 한건지 시종일관 불안한 모습을 보이고, 그의 정서적 불안은 MCU 영화의 주요한 갈등의 원인으로 끊임없이 재사용되고 있다. 아무리 감독이 다르다고 해도 같은 세계관 내에서 시간 순서대로 스토리가 진행되고 있는 것은 사실인데 이래도 되는 건가 싶기까지 하다. 아이언맨 3 엔딩에서 토니가 "I am iron man." 이라고 말하는 순간 내가 받았던 감동을 생각하면 이건 거의 배신에 가까운 행위이다. 이미 성장이 끝난 완성형 캐릭터를 자사의 다른 영화를 위해 마구잡이로 소비하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6. 수 많은 캐릭터가 등장함에도 자연스럽게 각각의 개성과 포인트를 잘 살려주었다는 점에서 굉장히 만족스러웠다. 이미 시리즈가 개봉해서 큰 인기를 얻었던 앤트맨이나, 가장 사랑받는 히어로 중 한명인 스파이더맨은 물론이고 다른 히어로들에 비해 초면에 가까운 블랙팬서까지 고르게, 매력을 보여준 것은 굉장한 일이다. 당장 옆 동네의 DC만 보더라도 루소 형제가 이 일을 얼마나 잘 해냈는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수어사이드 스쿼드 (Suicide Squad, 2016) 

2016년 최악의 영화이자, 2016년 최고의 뒷통수로 연출, 각본, 스토리의 개연성 그 어느 하나 소생시킬 수 없는 갱생 불가의 영역에 있는 희대의 망작이다. 전지구적 인지도가 있는 DC코믹스의 유명 빌런들을 한 자리에 모아 놓은 것 까지는 좋았으나 그들을 데려다 놓고 짜낸 스토리는 식상하고 식상한 우정과 사랑 그리고 연민에 관한 이야기였고, 빌런들이기 때문에 손속없이 임무를 수행할 수 있고 미친놈 미친년들이기 때문에 더욱 유쾌할 거라고 생각한 나의 예상은 그렇게 완전히 빗나가 버리고 말았다.


"내 친구들을 다치게 할 수 없어", "감히 내 친구들을 괴롭혀?" 와 같은 뉘앙스가 영화의 주요 스토리라인을 거의 장악하다 시피했는데, 왜 이렇게 우정타령 사랑타령을 해 대는지 알 수가 없다. 그리고 애초에 그런 것들은 히어로들의 영역이 아니던가. 수어사이드 스쿼드라는 영화를 보러 영화관을 찾은 사람 중 빌런들의 우정과 사연팔이를 기대했던 사람은 아마 아무도 없을 것이다. 오히려 이해할 수 없는 서사 때문에 각 빌런들이 지닌 고유의 매력이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가장 모르겠는 부분은 바로 조커인데, 어쩌다 그런 희대의 로맨티스트가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전의 배트맨 트릴로지나 코믹스에서의 조커가 익숙한 사람들에게는 너무나도 낯선 모습이다. 배트맨에서의 조커는 순수한 악과 혼돈을 대표하는 DC 최고의 슈퍼 빌런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긴데 비해, 수어사이드 스쿼드에서의 조커는 할리와의 관계를 제외한 모든 면에서 그저 희미할 뿐이다. 그렇다고 조커와 할리의 로맨스가 딱히 강한 인상을 남긴 것도 아니라는 사실은 상황을 더욱 우습게 만든다. 세기말 감성으로 떡칠된 그들의 로맨스를 지켜보고 있자면 시공간이 오그라드는 느낌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오글거림에 오글거림을 얹어 들이키는 격.


한 가지 인정할만 점은 사운드트랙이다. 영화를 위해 만들어진 곡들은 특유의 어두운 분위기가 잘살아서 아주 멋졌고, 또 그밖의 클래식한 명곡들 역시 굉장히 많이 가져다 썼다. 하지만 좋은 음악을 골라놓고 적절하게 사용하지 못한 점은 아쉽다. "이 장면엔 이 노래! 얘가 나올 때는 이 노래! 어때? 멋지지??" 이런 식으로 뜬금없이 팡팡 터지는 사운드트랙을 듣고 있자면 이 영화가 잘 할 수 있는 일은 대체 무엇인가 저절로 고민을 하게 된다.


하지만 정말로 슬픈 사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DC 영화에 무언가를 기대하고 있다는 점이다. 까놓고 말해서 캐릭터만 놓고 본다면 DC는 마블보다 훨씬 우위에 서 있었다. 어벤저스를 만들어내기 위해 마블은 우리에게 아이언맨과 캡틴아메리카가 누구인지 먼저 보여줘야했지만, 세상에 DC 트리니티(슈퍼맨/배트맨/원더우먼)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심지어 그래픽노블을 읽지 않는 사람들일지라도 말이다. 세상 사람들 모두가 아는 최고의 인기 캐릭터를 가지고 이런 똥만 만들어내는 것도 능력이라고 해야 할지... DC의 세계관을 좋아하는 한 사람의 팬으로써 앞으로 개봉이 예정된 샤잠, 아쿠아맨이 DCEU 세계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 일으켜 주길 바라보며 글을 마친다.


분노 (怒り, RAGE, 2016)


1. 멀티플렉스에서 다양성 영화라는 명목으로 상영하는 영화들의 경우, 대개 상영 기간이 짧고 특정 지점에서만 상영하는 것이 대부분이어서 마음먹었을 때 바로 관람하지 않으면 보기 어려울 때가 많다. <분노> 역시 그런 이유로 극장에서 관람하는 것을 거의 포기하고 있었는데, 마침 상상마당에서 상영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서 홍대까지 한걸음에 달려갔다.


2. 엔딩크레딧이 다 올라간 후 자리에서 일어서는데, 굉장한 피로감이 몰려왔다. 문자 그대로 완전히 지쳐버렸다고 해야 할까. 누군가가 지어낸, 가공의 이야기를 보면서 이렇게까지 감정을 소비할 수 있다는 사실에 약간 놀라기도 했다. 감독의 연출력과 배우의 기량 중 어느 하나도 부족하지 않았던 영화이기에 가능했던 일이 아닌가 싶다. 덧붙이자면 사카모토 류이치가 사운드트랙을 맡아서 음악마저도 너무나 훌륭했다. 


영화의 분위기와 주제가 가장 잘 드러났다고 생각하는 곡


3. 여기 저기에 스릴러라고 소개되어 있기는 하지만 영화가 진짜 보여주고자 한 것은 살인사건의 범인이 누구인지 밝혀내는 과정이 아니라, 누군가를 신뢰하거나 불신함으로 인해 절망하고 분노하는 사람들의 모습이었던 것 같다. 결국 믿음(혹은 불신)과 분노, 이 두 가지가 각각 다른 장소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는 세 가지 스토리 사이를 관통하는 하나의 주제인 것이다. 영화에는 불신으로 인해 사랑하는 사람을 잃거나 신뢰로 인해 배신의 상처를 입는 것, 크게 두가지의 이야기가 담겨 있는데 서로 역설적인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분노하고 슬퍼하며 괴로워하는 같은 결과를 도출해 낸다는 점이 특히 흥미로웠다.


3. 개인적으로는 도쿄의 이야기가 마음에 오래 남는다. 유마의 의심은 타당하고 합리적인 것이었지만, 그 작은 불신이 가져온 결과는 너무나도 가혹했다. 비극적이게도 나오토는 언젠가 그의 곁을 떠날 운명이었겠지만, 이별의 아픔과는 별개로 사랑하는 사람을 의심하고 부인했던 기억은 유마의 인생에 아주 오랫동안 깊은 죄책감과 흉터로 남을 것이다. 최소한 오키나와나 치바의 경우 관계 회복의 여지가 있지만, 도쿄는 그런 시도 조차 할 수 없으니.


4. 봉준호 감독이 나오토 역의 아야노 고를 걸어다니는 상처에 비유한 것을 보았는데 영화를 보고나니 비로소 이해가 됐다. 왠지 모르게 눈길이 가는 배우인듯. 이렇게 나의 새로운 필모그라피 탐색은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