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어사이드 스쿼드 (Suicide Squad, 2016) 

2016년 최악의 영화이자, 2016년 최고의 뒷통수로 연출, 각본, 스토리의 개연성 그 어느 하나 소생시킬 수 없는 갱생 불가의 영역에 있는 희대의 망작이다. 전지구적 인지도가 있는 DC코믹스의 유명 빌런들을 한 자리에 모아 놓은 것 까지는 좋았으나 그들을 데려다 놓고 짜낸 스토리는 식상하고 식상한 우정과 사랑 그리고 연민에 관한 이야기였고, 빌런들이기 때문에 손속없이 임무를 수행할 수 있고 미친놈 미친년들이기 때문에 더욱 유쾌할 거라고 생각한 나의 예상은 그렇게 완전히 빗나가 버리고 말았다.


"내 친구들을 다치게 할 수 없어", "감히 내 친구들을 괴롭혀?" 와 같은 뉘앙스가 영화의 주요 스토리라인을 거의 장악하다 시피했는데, 왜 이렇게 우정타령 사랑타령을 해 대는지 알 수가 없다. 그리고 애초에 그런 것들은 히어로들의 영역이 아니던가. 수어사이드 스쿼드라는 영화를 보러 영화관을 찾은 사람 중 빌런들의 우정과 사연팔이를 기대했던 사람은 아마 아무도 없을 것이다. 오히려 이해할 수 없는 서사 때문에 각 빌런들이 지닌 고유의 매력이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가장 모르겠는 부분은 바로 조커인데, 어쩌다 그런 희대의 로맨티스트가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전의 배트맨 트릴로지나 코믹스에서의 조커가 익숙한 사람들에게는 너무나도 낯선 모습이다. 배트맨에서의 조커는 순수한 악과 혼돈을 대표하는 DC 최고의 슈퍼 빌런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긴데 비해, 수어사이드 스쿼드에서의 조커는 할리와의 관계를 제외한 모든 면에서 그저 희미할 뿐이다. 그렇다고 조커와 할리의 로맨스가 딱히 강한 인상을 남긴 것도 아니라는 사실은 상황을 더욱 우습게 만든다. 세기말 감성으로 떡칠된 그들의 로맨스를 지켜보고 있자면 시공간이 오그라드는 느낌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오글거림에 오글거림을 얹어 들이키는 격.


한 가지 인정할만 점은 사운드트랙이다. 영화를 위해 만들어진 곡들은 특유의 어두운 분위기가 잘살아서 아주 멋졌고, 또 그밖의 클래식한 명곡들 역시 굉장히 많이 가져다 썼다. 하지만 좋은 음악을 골라놓고 적절하게 사용하지 못한 점은 아쉽다. "이 장면엔 이 노래! 얘가 나올 때는 이 노래! 어때? 멋지지??" 이런 식으로 뜬금없이 팡팡 터지는 사운드트랙을 듣고 있자면 이 영화가 잘 할 수 있는 일은 대체 무엇인가 저절로 고민을 하게 된다.


하지만 정말로 슬픈 사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DC 영화에 무언가를 기대하고 있다는 점이다. 까놓고 말해서 캐릭터만 놓고 본다면 DC는 마블보다 훨씬 우위에 서 있었다. 어벤저스를 만들어내기 위해 마블은 우리에게 아이언맨과 캡틴아메리카가 누구인지 먼저 보여줘야했지만, 세상에 DC 트리니티(슈퍼맨/배트맨/원더우먼)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심지어 그래픽노블을 읽지 않는 사람들일지라도 말이다. 세상 사람들 모두가 아는 최고의 인기 캐릭터를 가지고 이런 똥만 만들어내는 것도 능력이라고 해야 할지... DC의 세계관을 좋아하는 한 사람의 팬으로써 앞으로 개봉이 예정된 샤잠, 아쿠아맨이 DCEU 세계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 일으켜 주길 바라보며 글을 마친다.


영화 <현기증(Vertigo)>과 Bernard Herrmann


히치콕의 영화 중 내 머리 속에 가장 강렬한 인상을 남긴 것은 누가 뭐라고 해도 단연 <싸이코>이지만, 가장 매력적인 영화를 꼽으라고 한다면 주저 없이 <현기증>을 꼽을 것이다. 아름다운 한쌍의 남녀가 가진 비밀과 속임수, 그리고 서스펜스로 점철된 비극적인 로맨스는 시대를 막론하고 인기있는 스토리가 아니던가.



현기증기법(Vertigo Effect)이 사용되었던 계단


배우들의 걷는 방식까지 따로 지시했을 정도로 완벽주의자였던 히치콕이 이 영화를 통해 관객에게 보여주고자 의도한 다양한 장치들과(이를테면 Vertigo Effect) 큰 의미가 없지만 의미심장해 보이는 수 많은 장면들은(맥거핀) 나를 꿈을 꾸는 듯 어지러운 혼란의 세계로 안내했고, 스카티와 주디의 서로를 향한 편집증적인 사랑은 나의 마음을 황폐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나는 <현기증>의 매력에 굴복당했다. 그러나 영화가 지닌 수많은 매력 중에서도 가장 강렬하게 내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다름아닌 버나드 허먼이 작업한 사운드 트랙이다. 그의 음악은 초현실적인 분위기로 충만한 이 복잡한 영화를 한층 더 신비롭고 아름다운 작품으로 승화시켰다.



"Prelude And Rooftop"



킴 노박의 눈동자가 점점 클로즈 업 되면서 마치 현기증을 일으키기라도 하겠다는 듯 기하학적인 모양의 그래픽이 소용돌이 치듯 돌아가는 이 의미심장한 타이틀 시퀀스에 삽입된 곡은 Prelude And Rooftop로, 내가 <현기증> OST 앨범에서 두번째로 좋아하는 트랙이다. (트랙 #1)


앞으로 등장할 인물들의 신경질적이고 편집증적인 정서 상태를 예언이라도 하듯, 혹은 직후에 이어질 스카티의 불운한 사고를 암시하는 듯 불안한 감정을 극대화시키는 이 곡은 나로 하여금 "현기증"이라는 단어를 음악으로 전환한다면 바로 이런 느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가끔씩 기분이 내킬 때 마다 위의 타이틀 시퀀스 만을 감상할 때가 있는데, 그 때 마다 히치콕과 허먼의 시너지 공격은 나에게 가벼운 현기증을 불러 일으키곤 한다. 진짜 마법사들이 아닐까, 이 사람들?



"Scene D'Amour"



스카티는 매들린이 종탑에서 추락하여 사망한 이후 그녀와 꼭 닮은 주디를 만나 새로운 관계를 시작하게 되지만  잃어버린 연인에 대한 상실감이 이미 그를 정서적 불안정 상태로 몰아 넣었기 때문에 새로운 관계는 어딘지 모르게 불안하기만 하다. 그러던 중 그는 주디에게 매들린을 닮은 헤어 스타일과 의상을 강요하기까까지 하며, 주디를 통해 매들린과의 재회를 꿈꾸는 듯한 편집증적이고 도착적인 성향을 드러내 보인다.


일반적인 연인의 관계를 떠올리면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스카티를 사랑하는 한편 그에게 깊은 죄책감을 느끼고 있는 주디는 그의 요구를 수용해 주었고, (죄책감의 원인은 스포일러*) 마침내 매들린과 똑같은 모습으로 스카티의 앞에 등장하는 주디와 그런 그녀에게서 옛사랑을 겹쳐보며 만족감과 안도감을 느낀 스카티는 서로의 애정을 확인하기라도 하듯이 깊은 입맞춤을 나눈다. 바로 이 장면에서 등장하는 곡이 Scene D'Amour이다. (트랙 #15)


고혹적이면서도 어두움이 느껴지는 Scene D'Amour의 선율은 비이성적인 집착과 죄책감으로 얼룩진 두 남녀의 기이하고 비극적인 러브 스토리를 관객들이 감정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최고의 매개체이다. 개인적으로는 허먼이 히치콕과 함께 작업하여 남긴 결과물 중 가장 탐미적인 매력을 지닌 명곡이라고 생각한다.



분노 (怒り, RAGE, 2016)


1. 멀티플렉스에서 다양성 영화라는 명목으로 상영하는 영화들의 경우, 대개 상영 기간이 짧고 특정 지점에서만 상영하는 것이 대부분이어서 마음먹었을 때 바로 관람하지 않으면 보기 어려울 때가 많다. <분노> 역시 그런 이유로 극장에서 관람하는 것을 거의 포기하고 있었는데, 마침 상상마당에서 상영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서 홍대까지 한걸음에 달려갔다.


2. 엔딩크레딧이 다 올라간 후 자리에서 일어서는데, 굉장한 피로감이 몰려왔다. 문자 그대로 완전히 지쳐버렸다고 해야 할까. 누군가가 지어낸, 가공의 이야기를 보면서 이렇게까지 감정을 소비할 수 있다는 사실에 약간 놀라기도 했다. 감독의 연출력과 배우의 기량 중 어느 하나도 부족하지 않았던 영화이기에 가능했던 일이 아닌가 싶다. 덧붙이자면 사카모토 류이치가 사운드트랙을 맡아서 음악마저도 너무나 훌륭했다. 


영화의 분위기와 주제가 가장 잘 드러났다고 생각하는 곡


3. 여기 저기에 스릴러라고 소개되어 있기는 하지만 영화가 진짜 보여주고자 한 것은 살인사건의 범인이 누구인지 밝혀내는 과정이 아니라, 누군가를 신뢰하거나 불신함으로 인해 절망하고 분노하는 사람들의 모습이었던 것 같다. 결국 믿음(혹은 불신)과 분노, 이 두 가지가 각각 다른 장소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는 세 가지 스토리 사이를 관통하는 하나의 주제인 것이다. 영화에는 불신으로 인해 사랑하는 사람을 잃거나 신뢰로 인해 배신의 상처를 입는 것, 크게 두가지의 이야기가 담겨 있는데 서로 역설적인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분노하고 슬퍼하며 괴로워하는 같은 결과를 도출해 낸다는 점이 특히 흥미로웠다.


3. 개인적으로는 도쿄의 이야기가 마음에 오래 남는다. 유마의 의심은 타당하고 합리적인 것이었지만, 그 작은 불신이 가져온 결과는 너무나도 가혹했다. 비극적이게도 나오토는 언젠가 그의 곁을 떠날 운명이었겠지만, 이별의 아픔과는 별개로 사랑하는 사람을 의심하고 부인했던 기억은 유마의 인생에 아주 오랫동안 깊은 죄책감과 흉터로 남을 것이다. 최소한 오키나와나 치바의 경우 관계 회복의 여지가 있지만, 도쿄는 그런 시도 조차 할 수 없으니.


4. 봉준호 감독이 나오토 역의 아야노 고를 걸어다니는 상처에 비유한 것을 보았는데 영화를 보고나니 비로소 이해가 됐다. 왠지 모르게 눈길이 가는 배우인듯. 이렇게 나의 새로운 필모그라피 탐색은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