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인의 흔한 질병 중 하나는 불면증이다. 하루 종일 시선을 뗄 수 없는 모니터와 스마트폰 화면의 영향 때문인지, 아니면 그저 개인의 정신적인 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나 역시 잠못드는 밤을 보내는 경우가 꽤 많다. 수 시간을 불 꺼진 방 안에 누워 있어봐도 잠들지 못하는 것은 별로 유쾌한 경험은 아니다. 거기다 "다음날 아침에 출근 준비를 하려면 지금 빨리 자야하는데"라는 생각을 하기 시작하면 이상하게 더욱 더 잠이 오지 않고, 결국 다크 써클이 턱까지 내려온채 아침 지하철에 몸을 실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준비해 보았다. 잠이 안오는 밤에 돌려 듣기 좋은 앨범 시리즈를! 이것은 어디까지나 나의 개인적인 취향이므로 "이게 뭐냐, 오히려 잠이 싹 달아났다."하는 사람들도 있을 수 있겠지만, 혹시라도 이러한 방법이 잘 맞는 누군가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된다면 정말 기쁠 것 같다.





1. Max Richter의 <From Sleep>

<From Sleep>은 미니멀리즘을 대표하는 작곡가로 잘 알려진 막스 리히터의 수면 준비용 앨범이다. 단순하게 반복되는 차분한 선율을 집중해서 듣다 보면 어느덧 이것 저것 두서없이 떠오르던 잡 생각이 사라지고 편안한 상태에서 스르르 잠드는 경험을 할 수 있다. (개인적으로는 <The Blue Notebooks>를 더욱 좋아하지만 잠자리에 들 시간이라면 <From Sleep>을 추천하겠다.)






2. Kings of Convenience의 <Riot On an Empty Street>

2013년 가을 쯤이었던가. 친구와 함께 일본의 대마도 여행을 간 적이 있는데, 그 때 묵었던 좁은 호텔 방에서 <Riot On an Empty Street>을 듣다가 잠들었던 기억이 있다. 추운 나라에서 만들어진 따뜻한 분위기의 이 앨범을 듣다보면 왠지모를 포근함을 느끼며 숙면을 취할 수 있을 것이다.






3. Alexis Ffrench의 <Stolen Lullabies>

영국의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인 엘렉시스 프렌치의 2013년 작인 <Stolen Lullabies>는 전반적으로 미니멀리즘의 영향을 받은 듯 단순하게 반복되는 피아노의 멜로디 위로 드라마틱한 현악의 선율이 덧입혀진 음악들을 담고 있다. 각 트랙의 공동점이 있다면 굉장히 아름답다는 것!






4. Jim Dale의 <Harry Potter Audio Book Series>

음악은 아니지만 들으면 잠이 잘오는 앨범인 것은 맞아서 추가. 원래는 영어공부를 하려고 들으려고 한 건데, 들을 때 마다 너무 잠이 잘 와서 한 동안 이 앨범을 잠자리에 일부러 틀어 두기도 했다. 이런 경험을 나만 하는 건 아닐 거야. 비슷한 예로 BBC 라디오 채널을 들 수도 있겠다.




"I want to be a child star, mom!"을 외쳤던 꼬마들이 어느새 이렇게 자라서 나의 마음을 흡족하게 만드는 앨범을 만들어 내다니, 혈연 관계에 있는 것도 아닌데 마치 랜선으로 키워낸 조카들을 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건 왜일까. 


2000년대 초중반에 니켈로디언에서 방영한 모큐멘터리 시리즈인 <The Naked Brothers Band>의 주인공이었던 Wolff 형제는 어느 순간 이제는 어린 시절을 졸업하고 진정한 어른의 모습을 모여주기라도 하겠다는 듯이 The Naked Brothers Band라는 이름을 버리고 Nat & Alex Wolff로 새로 태어났다. (밴드 이름이 변경된 주요 이유는 아마도 어른들의 사정이겠지만, 결과적으로는 좋은 결정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에 맞추어 그들의 음악 역시 전형적인 Teen Pop에서 Rock을 베이스로 한 조금 더 거칠고 어른스러운 사운드로 변모하였다. "I don't want to go to school."에서 "Did you tell him all our shit?"이라니, 이만하면 꽤 훌륭한 성인식이 아닌가.


청소년기에 니켈로디언과 디즈니채널을 즐겨본 나는 그 시절의 스타들의 거취에 관심이 많은 편인데, 대부분 어릴 때 반짝 인기를 얻고 그들을 스타로 만들어준 쇼가 종영되면 그와 함께 조용히 커튼 뒤로 사라지는 느낌이어서 마음이 좋지 못했다. 그러던 와중에 이렇게나 나의 취향을 저격하는 작업물을 보여주는 친구들이 등장해서 정말 기쁘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앞으로 더욱 좋은 결과물을 만들어내서 자신들의 능력이 어린 시절의 한때 뿐이 아니라는 것을 많은 리스너들에게 보여주는 멋진 아티스트로 성장해 준다면 좋을 것 같다.


덧. Nat & Alex Wolff가 영향을 받은 아티스트들을 살펴 보니 이 친구들이 어떻게 나의 취향을 저격할 수 있었던 것인가에 대한 해답이 나왔다. The Beatles, Nirvana, The Killers, Weezer, Coldplay....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I keep rolling around this town, rolling around this town

But nobody wants to see me, nobody wants to see me

I'm bringing 'em down





기분이 다운되는 날에는 시끄러운 음악을 듣고 싶지 않아 진다. 남의 속도 모르고 광광 울려대는 음악들이 예전처럼 신나게 느껴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게 조금 다른 노래를 들어볼까 하고 스포티파이의 플레이리스트를 돌고 또 돌다가 발견한 것이 Seoul의 I Becaome A Shade였다. 내가 나고 자란 고향이 지구 반대편에서 활동 중인 어느 밴드의 이름으로 사용되고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기 때문에 처음에는 Soul을 잘못 본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아무리 눈을 비비고 다시 보아도 Seoul은 Seoul이었다.


밴드의 이름은 정말 익숙하고 친근하지만 국적은 캐나다이고, 거기다 음악은 몽환적인 분위기의 드림 팝이어서 저절로 왠지 모를 괴리감이 느껴졌다. 그래서 결국 이 짤을 떠올리고야 말았다...!





Seoul의 음악을 듣다 보니 문득 떠오른 것이 있다. "캐나다 사람들인데 왜 밴드 이름은 서울로 지은거지?"

친절한 구글로 부터 이 의문에 대한 해답을 얻을 수 있었다. 사실 Seoul의 멤버들은 한 번도 한국에 와 본적이 없고, 그렇기 때문에 도시 서울로부터 어떤 영감을 받은 것은 아니라고 한다. 다만, 추구하는 음악이 도시적인 것이기 때문에 도시 이름을 밴드명으로 짓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했고, 그 중 Seoul이 영혼을 의미하는 Soul과 어감이 비슷한데다 고독을 나타내는 Sole과도 어감이 비슷해서 마음에 들었다는 것. 


그러고 보니 내가 들었던 Seoul의 음악에서는 왠지 모를 도시의 적막이 느껴지곤 했다. 화려하고 세련된 도시의 이면에 감추어진 끝없는 어둠과 고요함이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스포티파이에 등록된 수 많은 음반들 중에서 <I Become A Shade>가 울적한 내 마음을 끌어당겼던 것이 아닐까.


<I Become A Shade>의 수록곡 I Become A Shade



2010년대에 등장한 밴드 답지 않게 Seoul은 SNS를 비롯한 각종 소셜 미디어에 본인들을 직접적으로 노출하는 것을 꺼리는 듯한 행보를 보이고 있다. 그 때문에 밴드의 근황이나 정보를 쉽게 얻기 어려워서 조금 불편하긴 하지만, 외향이나 사생활이 주는 이미지 보다는 먼저 음악을 전달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그들의 생각은 오디오 보다는 비주얼이 더욱 각광받는 오늘날의 사회에 쉽게 적응하지 못하는 나의 마음을 부드럽게 달래 준다.


<I Become A Shade>의 수록곡 Stay With Us


<I Become A Shade>의 수록곡 Haunt / A Light


 

아무것도 하기 싫고 작은 일에도 짜증이 나는 요즘, 소소하게나마 나의 마음을 위로해주는 밴드가 있다. 자신들의 음악을 듣는 사람들에게 행운과 행복이 깃들기를 바란다는 일본의 인디밴드 Lucky Tapes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한때는 정말 열심히 일본 음악을 들었던 시기도 있었는데, 이제는 이렇게 나의 취향을 마구 저격하는 밴드의 등장조차 전혀 눈치채지 못하는 사람이 되고 말았다니. 이정도면 더쿠 자격 박탈감이다.

 

Lucky Tapes의 노래 중에서도 가장 추천하고싶은 것은 지난 가을에 발매된 <Virtual Gravity>에 수록된 Gravity이다. (트랙 #3) 잠들기 전에 가만히 침대에 누워 이 곡을 듣고 있자면, 보컬인 타카하시 카이의 따뜻한 목소리와 나의 하루를 대변하는 것만 같은 신랄하고도 따뜻한 노랫말이 하루 종일 세상살이에 치인 나의 너덜너덜한 마음을 포근하게 감싸준다.

 

 


 

한숨 섞인 목소리로 과거를 한탄해봤자
특별한 일 같은 건 일어나지 않아

 

그런 시시한 것들을 생각하는 사이에
또 이슥하게 밤은 찾아 오네

 

Virtual Gravity
You can find your better life
before the stars go out

 

 

 

같은 앨범에 수록된 Boogie Nights와 シェリー 또한 들어봄직한 추천곡. 특히 シェリー의 경우 팬들이 오랫동안 음원화를 기다려왔을 만큼 큰 사랑을 받고 있는 곡이기도 하니 Lucky Tapes에게 관심이 생겼다면 반드시 체크해 보도록 하자.

 


영화 <현기증(Vertigo)>과 Bernard Herrmann


히치콕의 영화 중 내 머리 속에 가장 강렬한 인상을 남긴 것은 누가 뭐라고 해도 단연 <싸이코>이지만, 가장 매력적인 영화를 꼽으라고 한다면 주저 없이 <현기증>을 꼽을 것이다. 아름다운 한쌍의 남녀가 가진 비밀과 속임수, 그리고 서스펜스로 점철된 비극적인 로맨스는 시대를 막론하고 인기있는 스토리가 아니던가.



현기증기법(Vertigo Effect)이 사용되었던 계단


배우들의 걷는 방식까지 따로 지시했을 정도로 완벽주의자였던 히치콕이 이 영화를 통해 관객에게 보여주고자 의도한 다양한 장치들과(이를테면 Vertigo Effect) 큰 의미가 없지만 의미심장해 보이는 수 많은 장면들은(맥거핀) 나를 꿈을 꾸는 듯 어지러운 혼란의 세계로 안내했고, 스카티와 주디의 서로를 향한 편집증적인 사랑은 나의 마음을 황폐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나는 <현기증>의 매력에 굴복당했다. 그러나 영화가 지닌 수많은 매력 중에서도 가장 강렬하게 내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다름아닌 버나드 허먼이 작업한 사운드 트랙이다. 그의 음악은 초현실적인 분위기로 충만한 이 복잡한 영화를 한층 더 신비롭고 아름다운 작품으로 승화시켰다.



"Prelude And Rooftop"



킴 노박의 눈동자가 점점 클로즈 업 되면서 마치 현기증을 일으키기라도 하겠다는 듯 기하학적인 모양의 그래픽이 소용돌이 치듯 돌아가는 이 의미심장한 타이틀 시퀀스에 삽입된 곡은 Prelude And Rooftop로, 내가 <현기증> OST 앨범에서 두번째로 좋아하는 트랙이다. (트랙 #1)


앞으로 등장할 인물들의 신경질적이고 편집증적인 정서 상태를 예언이라도 하듯, 혹은 직후에 이어질 스카티의 불운한 사고를 암시하는 듯 불안한 감정을 극대화시키는 이 곡은 나로 하여금 "현기증"이라는 단어를 음악으로 전환한다면 바로 이런 느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가끔씩 기분이 내킬 때 마다 위의 타이틀 시퀀스 만을 감상할 때가 있는데, 그 때 마다 히치콕과 허먼의 시너지 공격은 나에게 가벼운 현기증을 불러 일으키곤 한다. 진짜 마법사들이 아닐까, 이 사람들?



"Scene D'Amour"



스카티는 매들린이 종탑에서 추락하여 사망한 이후 그녀와 꼭 닮은 주디를 만나 새로운 관계를 시작하게 되지만  잃어버린 연인에 대한 상실감이 이미 그를 정서적 불안정 상태로 몰아 넣었기 때문에 새로운 관계는 어딘지 모르게 불안하기만 하다. 그러던 중 그는 주디에게 매들린을 닮은 헤어 스타일과 의상을 강요하기까까지 하며, 주디를 통해 매들린과의 재회를 꿈꾸는 듯한 편집증적이고 도착적인 성향을 드러내 보인다.


일반적인 연인의 관계를 떠올리면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스카티를 사랑하는 한편 그에게 깊은 죄책감을 느끼고 있는 주디는 그의 요구를 수용해 주었고, (죄책감의 원인은 스포일러*) 마침내 매들린과 똑같은 모습으로 스카티의 앞에 등장하는 주디와 그런 그녀에게서 옛사랑을 겹쳐보며 만족감과 안도감을 느낀 스카티는 서로의 애정을 확인하기라도 하듯이 깊은 입맞춤을 나눈다. 바로 이 장면에서 등장하는 곡이 Scene D'Amour이다. (트랙 #15)


고혹적이면서도 어두움이 느껴지는 Scene D'Amour의 선율은 비이성적인 집착과 죄책감으로 얼룩진 두 남녀의 기이하고 비극적인 러브 스토리를 관객들이 감정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최고의 매개체이다. 개인적으로는 허먼이 히치콕과 함께 작업하여 남긴 결과물 중 가장 탐미적인 매력을 지닌 명곡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오아시스나 노엘 갤러거를 통해 절대 듣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던 음악들이 가득한 <Who Built The Moon>을 듣고 있자니 어쩐지 신기한 기분이 든다. 취향에 맞지 않는다거나 실망한 것이 아니라 문자 그대로 신기한 느낌이랄까. 새로운 이름과 함께 앞서 발매한 두 장의 정규 앨범을 통해 점점 그동안 하지 않던 음악을 시도해보는구나 싶긴 했지만 적어도 그 때는 오아시스 시절과의 유사성이 조금이나마 느껴졌었는데, 세 번째 앨범에 이르러서는 완전히 다른 별개의 음악을 하는 아티스트가 되어 버렸다. 내가 그에게서 듣고싶어하는 음악들과는 약간 거리가 멀어졌지만 이것은 이것대로 그만의 매력이 느껴진다.


시작부터 확실히 전과 다름이 느껴졌던 리드 싱글 <Holy Mountain>


단순히 개인적인 음악의 취향을 따르자면 클래식한 Rock & Roll 감성이 가득 묻어나던 리암 갤러거의 <As You Were>이 조금 더 익숙하고 듣기 편하지만, 어딘가 모르게 색다른 <Who Built The Moon> 역시 그리 나쁘지는 않다. 좋아하는 아티스트가 내가 좋아하는 장르의 음악을 해 준다면 더할나위 없이 좋겠지만, 설령 그렇지 않더라도 결과물이 못봐줄 꼴이 아닌 이상 열심히 응원하는 수 밖에.


원하는 랩퍼를 찾지 못해 결국 가사 없이 첫번째 트랙을 차지하게 된 묵직하고 날카로운 느낌의 <Fort Knox>가 들려주는 사이키델릭한 분위기도 좋고, 벌써부터 라이브 공연에서 관객들과 하나가 되어 함께 부를 것이 기대되는 <Keep On Reaching>, 전형적인 노엘 갤러거 식의 발라드 트랙인 <Dead In The Water>도 너무 아름다운 곡이지만, <Who Built The Moon>에서 내가 가장 많이 돌려 들었던 곡은 <The Man Who Built The Moon>이다. 어딘지 모르게 무책임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무한한 긍정의 에너지를 뿜어내던, 나의 동경을 모두 가져가 버린 오아시스의 음악과 가장 상반된다고 느낀 곡이어서 지금까지와는 사뭇 다른 다크한 매력을 느낄 수 있다. 멍하니 듣고 있다 보면 왠지 포스트 아포칼립스를 다룬 영화의 한 장면이 떠오르기도 한다. 사운드 트랙으로 사용해도 제법 느낌이 있을 듯.


<Who Built The Moon>에서 가장 많이 들었던 어둡고 무거운 분위기의 10번 트랙.


심심해서 여러 매체의 앨범 평을 둘러보는데, 정말 뜻밖에도 피치포크의 점수가 높아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기존의 오아시스의 음악과(DM, MG) 노엘 갤러거를 좋아하던 나에게는 어딘지 모르게 낯선 이 앨범이, 오아시스를 저평가해온 피치포크의 취향을 저격했다니 참으로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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