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교동에서의 뜻밖의 발견
서교동 골목을 걷다가 발견한 왠지모르게 낯이 익은 만두 집의 네온사인. 어디서 봤을까 가만히 서서 한참을 보다보니 앗 하고 떠오른 것이 블러의 <The Magic Whip> 앨범 커버였다. 만두가게 사장님이 블러의 팬이신 걸까.
어쨌든 생각난 김에 오랜만에 <Lonesome Streer>을 듣는 중이다. 노래를 듣다보니 이 앨범이 막 발매 되었을 때, 내한 이슈로 커뮤니티가 들썩이던 것이 생각난다. 20년째 재내한이 없다니 너무나도 가혹한 현실.
1. 이 구역의 기부천사 답게 토익 인강을 결제해두고 공부를 하지 않고 있다. 어쩌지. 토익 800점 이상이 정말 절실히 필요하건만 왜 나의 몸뚱이는 이렇게 무거운 것이고, 나의 머리는 왜 아무것도 기억하고 싶지 않아 하는 것일까. 내가 토익과 인연이 없다는 것은 이미 몇 년 전에 밝혀진 사실이지만 오늘따라 현실이 무겁게 느껴진다.
2. 새해의 첫 달부터 넷플릭스의 열혈 시청자가 되어서 차근차근 모든 드라마를 접수해가는 중이다. 이번 주에 즐겨 본 tv쇼는 너무 너무 사랑스러운 크리스틴 벨이 주연으로 등장하는 <굿 플레이스>인데, 사후세계를 천국과 지옥이 아닌 굿 플레이스와 배드 플레이스로 나눈 상상력이 꽤 기발하다. 편 당 러닝타임이 20분 정도로 매우 짧아서 가볍게 보기도 매우 좋은데다 시즌 종반 부에는 뜻밖의 반전도 기다리고 있으니 일상이 무료한 사람에게 적극 추천하고 싶다. 사후 세계와 윤리에 대해 꽤 진지하게 고찰해보는 기회가 될지도 모른다.
미드 <히어로즈>의 엘부터 영화 <벌레스크>의 니키까지 내가 영상 매체에서 봤던 크리스틴 벨은 주로 주인공과 적대관계에 있는 악역인 경우가 많았다. 그 때문인지 내 머리 속의 크리스틴은 언제나 사랑스러운 악녀이다. (겨울왕국의 안나는 예외로 하자.) <굿 플레이스>에서 맡은 엘리노어 역시 미워할 수 없는 악녀 캐릭터로 그녀에게 맞춘 듯이 잘 어울린다.
3. 리디북스 페이퍼 프로가 사고 싶어서 틈이 날 때마다 웹 사이트를 기웃거리고 있다. 내가 사용중인 킨들에게 불만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한국 책을 구입해서 읽기가 지나치게 불편하다는 극복하기 어려운 단점이 있기 때문에 자꾸 국내용 컨텐츠에 특화된 기기로 눈길이 가는 것 같다. 애초의 킨들을 선택한 것이 잘못이었을 지도 모르겠다. 내가 원서를 읽으면 얼마나 읽는다고. 스스로를 과대평가한 자의 말로는 이토록 비참하다.
한 걸음 쉬어가고 싶을 때, Lucky Tapes의 Gravity
아무것도 하기 싫고 작은 일에도 짜증이 나는 요즘, 소소하게나마 나의 마음을 위로해주는 밴드가 있다. 자신들의 음악을 듣는 사람들에게 행운과 행복이 깃들기를 바란다는 일본의 인디밴드 Lucky Tapes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한때는 정말 열심히 일본 음악을 들었던 시기도 있었는데, 이제는 이렇게 나의 취향을 마구 저격하는 밴드의 등장조차 전혀 눈치채지 못하는 사람이 되고 말았다니. 이정도면 더쿠 자격 박탈감이다.
Lucky Tapes의 노래 중에서도 가장 추천하고싶은 것은 지난 가을에 발매된 <Virtual Gravity>에 수록된 Gravity이다. (트랙 #3) 잠들기 전에 가만히 침대에 누워 이 곡을 듣고 있자면, 보컬인 타카하시 카이의 따뜻한 목소리와 나의 하루를 대변하는 것만 같은 신랄하고도 따뜻한 노랫말이 하루 종일 세상살이에 치인 나의 너덜너덜한 마음을 포근하게 감싸준다.
한숨 섞인 목소리로 과거를 한탄해봤자
특별한 일 같은 건 일어나지 않아
그런 시시한 것들을 생각하는 사이에
또 이슥하게 밤은 찾아 오네
Virtual Gravity
You can find your better life
before the stars go out
같은 앨범에 수록된 Boogie Nights와 シェリー 또한 들어봄직한 추천곡. 특히 シェリー의 경우 팬들이 오랫동안 음원화를 기다려왔을 만큼 큰 사랑을 받고 있는 곡이기도 하니 Lucky Tapes에게 관심이 생겼다면 반드시 체크해 보도록 하자.
영화에 현실감을 더하는 마법같은 음악들 Vol. 1
영화 <현기증(Vertigo)>과 Bernard Herrmann
히치콕의 영화 중 내 머리 속에 가장 강렬한 인상을 남긴 것은 누가 뭐라고 해도 단연 <싸이코>이지만, 가장 매력적인 영화를 꼽으라고 한다면 주저 없이 <현기증>을 꼽을 것이다. 아름다운 한쌍의 남녀가 가진 비밀과 속임수, 그리고 서스펜스로 점철된 비극적인 로맨스는 시대를 막론하고 인기있는 스토리가 아니던가.
현기증기법(Vertigo Effect)이 사용되었던 계단
배우들의 걷는 방식까지 따로 지시했을 정도로 완벽주의자였던 히치콕이 이 영화를 통해 관객에게 보여주고자 의도한 다양한 장치들과(이를테면 Vertigo Effect) 큰 의미가 없지만 의미심장해 보이는 수 많은 장면들은(맥거핀) 나를 꿈을 꾸는 듯 어지러운 혼란의 세계로 안내했고, 스카티와 주디의 서로를 향한 편집증적인 사랑은 나의 마음을 황폐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나는 <현기증>의 매력에 굴복당했다. 그러나 영화가 지닌 수많은 매력 중에서도 가장 강렬하게 내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다름아닌 버나드 허먼이 작업한 사운드 트랙이다. 그의 음악은 초현실적인 분위기로 충만한 이 복잡한 영화를 한층 더 신비롭고 아름다운 작품으로 승화시켰다.
"Prelude And Rooftop"
킴 노박의 눈동자가 점점 클로즈 업 되면서 마치 현기증을 일으키기라도 하겠다는 듯 기하학적인 모양의 그래픽이 소용돌이 치듯 돌아가는 이 의미심장한 타이틀 시퀀스에 삽입된 곡은 Prelude And Rooftop로, 내가 <현기증> OST 앨범에서 두번째로 좋아하는 트랙이다. (트랙 #1)
앞으로 등장할 인물들의 신경질적이고 편집증적인 정서 상태를 예언이라도 하듯, 혹은 직후에 이어질 스카티의 불운한 사고를 암시하는 듯 불안한 감정을 극대화시키는 이 곡은 나로 하여금 "현기증"이라는 단어를 음악으로 전환한다면 바로 이런 느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가끔씩 기분이 내킬 때 마다 위의 타이틀 시퀀스 만을 감상할 때가 있는데, 그 때 마다 히치콕과 허먼의 시너지 공격은 나에게 가벼운 현기증을 불러 일으키곤 한다. 진짜 마법사들이 아닐까, 이 사람들?
"Scene D'Amour"
스카티는 매들린이 종탑에서 추락하여 사망한 이후 그녀와 꼭 닮은 주디를 만나 새로운 관계를 시작하게 되지만 잃어버린 연인에 대한 상실감이 이미 그를 정서적 불안정 상태로 몰아 넣었기 때문에 새로운 관계는 어딘지 모르게 불안하기만 하다. 그러던 중 그는 주디에게 매들린을 닮은 헤어 스타일과 의상을 강요하기까까지 하며, 주디를 통해 매들린과의 재회를 꿈꾸는 듯한 편집증적이고 도착적인 성향을 드러내 보인다.
일반적인 연인의 관계를 떠올리면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스카티를 사랑하는 한편 그에게 깊은 죄책감을 느끼고 있는 주디는 그의 요구를 수용해 주었고, (죄책감의 원인은 스포일러*) 마침내 매들린과 똑같은 모습으로 스카티의 앞에 등장하는 주디와 그런 그녀에게서 옛사랑을 겹쳐보며 만족감과 안도감을 느낀 스카티는 서로의 애정을 확인하기라도 하듯이 깊은 입맞춤을 나눈다. 바로 이 장면에서 등장하는 곡이 Scene D'Amour이다. (트랙 #15)
고혹적이면서도 어두움이 느껴지는 Scene D'Amour의 선율은 비이성적인 집착과 죄책감으로 얼룩진 두 남녀의 기이하고 비극적인 러브 스토리를 관객들이 감정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최고의 매개체이다. 개인적으로는 허먼이 히치콕과 함께 작업하여 남긴 결과물 중 가장 탐미적인 매력을 지닌 명곡이라고 생각한다.
노엘 갤러거의 새로운 발견, <Who Built The Moon>
내가 오아시스나 노엘 갤러거를 통해 절대 듣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던 음악들이 가득한 <Who Built The Moon>을 듣고 있자니 어쩐지 신기한 기분이 든다. 취향에 맞지 않는다거나 실망한 것이 아니라 문자 그대로 신기한 느낌이랄까. 새로운 이름과 함께 앞서 발매한 두 장의 정규 앨범을 통해 점점 그동안 하지 않던 음악을 시도해보는구나 싶긴 했지만 적어도 그 때는 오아시스 시절과의 유사성이 조금이나마 느껴졌었는데, 세 번째 앨범에 이르러서는 완전히 다른 별개의 음악을 하는 아티스트가 되어 버렸다. 내가 그에게서 듣고싶어하는 음악들과는 약간 거리가 멀어졌지만 이것은 이것대로 그만의 매력이 느껴진다.
시작부터 확실히 전과 다름이 느껴졌던 리드 싱글 <Holy Mountain>
단순히 개인적인 음악의 취향을 따르자면 클래식한 Rock & Roll 감성이 가득 묻어나던 리암 갤러거의 <As You Were>이 조금 더 익숙하고 듣기 편하지만, 어딘가 모르게 색다른 <Who Built The Moon> 역시 그리 나쁘지는 않다. 좋아하는 아티스트가 내가 좋아하는 장르의 음악을 해 준다면 더할나위 없이 좋겠지만, 설령 그렇지 않더라도 결과물이 못봐줄 꼴이 아닌 이상 열심히 응원하는 수 밖에.
원하는 랩퍼를 찾지 못해 결국 가사 없이 첫번째 트랙을 차지하게 된 묵직하고 날카로운 느낌의 <Fort Knox>가 들려주는 사이키델릭한 분위기도 좋고, 벌써부터 라이브 공연에서 관객들과 하나가 되어 함께 부를 것이 기대되는 <Keep On Reaching>, 전형적인 노엘 갤러거 식의 발라드 트랙인 <Dead In The Water>도 너무 아름다운 곡이지만, <Who Built The Moon>에서 내가 가장 많이 돌려 들었던 곡은 <The Man Who Built The Moon>이다. 어딘지 모르게 무책임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무한한 긍정의 에너지를 뿜어내던, 나의 동경을 모두 가져가 버린 오아시스의 음악과 가장 상반된다고 느낀 곡이어서 지금까지와는 사뭇 다른 다크한 매력을 느낄 수 있다. 멍하니 듣고 있다 보면 왠지 포스트 아포칼립스를 다룬 영화의 한 장면이 떠오르기도 한다. 사운드 트랙으로 사용해도 제법 느낌이 있을 듯.
<Who Built The Moon>에서 가장 많이 들었던 어둡고 무거운 분위기의 10번 트랙.
심심해서 여러 매체의 앨범 평을 둘러보는데, 정말 뜻밖에도 피치포크의 점수가 높아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기존의 오아시스의 음악과(DM, MG) 노엘 갤러거를 좋아하던 나에게는 어딘지 모르게 낯선 이 앨범이, 오아시스를 저평가해온 피치포크의 취향을 저격했다니 참으로 흥미롭다.
용서가 필요한 사람들의 이야기, 분노
분노 (怒り, RAGE, 2016)
1. 멀티플렉스에서 다양성 영화라는 명목으로 상영하는 영화들의 경우, 대개 상영 기간이 짧고 특정 지점에서만 상영하는 것이 대부분이어서 마음먹었을 때 바로 관람하지 않으면 보기 어려울 때가 많다. <분노> 역시 그런 이유로 극장에서 관람하는 것을 거의 포기하고 있었는데, 마침 상상마당에서 상영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서 홍대까지 한걸음에 달려갔다.
2. 엔딩크레딧이 다 올라간 후 자리에서 일어서는데, 굉장한 피로감이 몰려왔다. 문자 그대로 완전히 지쳐버렸다고 해야 할까. 누군가가 지어낸, 가공의 이야기를 보면서 이렇게까지 감정을 소비할 수 있다는 사실에 약간 놀라기도 했다. 감독의 연출력과 배우의 기량 중 어느 하나도 부족하지 않았던 영화이기에 가능했던 일이 아닌가 싶다. 덧붙이자면 사카모토 류이치가 사운드트랙을 맡아서 음악마저도 너무나 훌륭했다.
영화의 분위기와 주제가 가장 잘 드러났다고 생각하는 곡
3. 여기 저기에 스릴러라고 소개되어 있기는 하지만 영화가 진짜 보여주고자 한 것은 살인사건의 범인이 누구인지 밝혀내는 과정이 아니라, 누군가를 신뢰하거나 불신함으로 인해 절망하고 분노하는 사람들의 모습이었던 것 같다. 결국 믿음(혹은 불신)과 분노, 이 두 가지가 각각 다른 장소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는 세 가지 스토리 사이를 관통하는 하나의 주제인 것이다. 영화에는 불신으로 인해 사랑하는 사람을 잃거나 신뢰로 인해 배신의 상처를 입는 것, 크게 두가지의 이야기가 담겨 있는데 서로 역설적인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분노하고 슬퍼하며 괴로워하는 같은 결과를 도출해 낸다는 점이 특히 흥미로웠다.
3. 개인적으로는 도쿄의 이야기가 마음에 오래 남는다. 유마의 의심은 타당하고 합리적인 것이었지만, 그 작은 불신이 가져온 결과는 너무나도 가혹했다. 비극적이게도 나오토는 언젠가 그의 곁을 떠날 운명이었겠지만, 이별의 아픔과는 별개로 사랑하는 사람을 의심하고 부인했던 기억은 유마의 인생에 아주 오랫동안 깊은 죄책감과 흉터로 남을 것이다. 최소한 오키나와나 치바의 경우 관계 회복의 여지가 있지만, 도쿄는 그런 시도 조차 할 수 없으니.
4. 봉준호 감독이 나오토 역의 아야노 고를 걸어다니는 상처에 비유한 것을 보았는데 영화를 보고나니 비로소 이해가 됐다. 왠지 모르게 눈길이 가는 배우인듯. 이렇게 나의 새로운 필모그라피 탐색은 시작된다.......